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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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너머에 이르려면

로버트러플린
한국과학기술원
대전시유성구 구성동373

조선일보 2005년 12월9일
[번역: 이현경]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와 아주 비슷하다. 아일랜드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정복했던 영국인을 증오하며 ‘영국’이란 말만 들어도 쉽게 흥분해서 “영국인들이 우리에게 했던 짓을 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안정되면, 냉정을 되찾고 영국이 하는 모든 것을 조용히 계속 모방한다. 한국인들은 종종 동쪽 이웃나라가 별반 중요하지 않은 듯 말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한국이 벤치마킹하면서 경제적 모델로 삼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나는 지금 하와이에서 열리고 있는 재료물리학에 관한 소규모 학술회의에 일본인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참석하고 있는 중이기에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예산 규모가 좀 더 크다는 것 이외에는 한국 과학자들이 제주도에 가서 회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경우 모두, 약간의 유흥과 개최지의 아름다움 등으로 끝없이 파워 포인트 발표를 들어야 하는 고통을 상쇄한다. 내가 이 회의에 참석한 이유는 몇 년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소규모 연구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와 관련된 국제회의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도 이제 종결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학술회의장을 떠나 태평양 연안의 검은 용암 돌기 위에서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와 야자수 사이를 관통해서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다. 조금 전에 작은 폭풍이 불어서 평화롭던 분위기를 살짝 헤쳐 놓았다.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태양은 한참 전에 저물었고, 구름이 달빛을 완전히 가린 탓에 하늘과 바다를 구별할 수조차 없다. 칠흑 같은 어둠을 넘어 부푼 바다는 마치 사자가 숨어 있다가 뛰어나와 공격하고는 아무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 마냥 슬그머니 밀려온다.

이 학술회의의 마지막 날 분위기는 겉으로는 매우 유쾌했지만 실상은 매우 침울했다.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그러듯이, 일본인 과학자들도 자신의 슬픔을 일로 달래는 데 익숙해서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안에 있는 패배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우리 과학자들은 자신의 경력을 걸고 이번 연구가 위대한 발견과 과학적 영광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각자의 정부들은 성과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 연구비를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결정했다. 우리는 모두 마치 도박을 할 때 작은 돈을 되풀이해서 잃으면서도 마지막 한 푼을 최후의 한판에 걸었지만 결국 잃고 만 것처럼 느낀다. 여기에 안전하고 확고한 직업 찾기에 열중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있다.

이 모임에 참가한 개개인들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고 과거에 모두 괄목할 발견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실패로 인해 야기된 불확실성에 용감하게 맞서면서 쓸쓸한 고도(孤島)에 있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동요시키지만, 그것은 수치스럽거나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중요한 과학적 진보란 중요한 사업적 성취와 마찬가지로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일궈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연구자란 단지 더 과감하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한국인들도 이 원리를 깨닫는 데 뒤처져 있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은 훨씬 더 나아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경쟁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출(日出) 너머에 이르기까지는 계획뿐 아니라 심대한 용기와 정신력이 요구된다.

우리들은 젊었을 때 종종 진보의 행진을 마치 잘 짜인 군사작전처럼 냉혹하고 한결같은 것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보란 마치 이 섬들을 만들어낸 화산의 분출과도 같이, 때때로 난폭성에 가로막히기도 한다. 대지가 갈라지면서 불과 죽음을 토해내면, 여러분들이 소중히 간직하며 일생 동안 쌓아 올려왔던 것들이 일순간에 휩쓸려 파묻힐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난폭성은 새로운 섬을 창조하고, 작은 짐승과 식물들은 이 섬을 정복해서 새롭게 만든다. 세월을 거치며 그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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